[BBS 불교방송] 2013.8.2.
지금은 수행시대-위빠사나 42
-묘원 법사님, 방송을 들으면서 궁금했던 것을 많이 해소하고 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지난번에 성불에 대해서 말씀을 해주셨는데, 성불과 부처의 성품이라는 말이 같은 말인지요, 아니면 다른 뜻이 있는지요?
성불과 부처의 성품은 다른 말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부처를 빨리어로 붓다(Buddha)라고 합니다. 붓다는 ‘깨달은 자’라는 말입니다. 무엇을 깨달았는가 하면, 고집멸도 사성제를 깨달아서 윤회가 끝난 것을 의미합니다. 성불(成佛)이란 모든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해탈의 경지인 붓다의 도과를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불은 부처가 되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인류역사에 붓다는 오직 25분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붓다가 될 수는 있지만 아무나 붓다가 되지는 못합니다. 붓다는 겁을 통하여 한분씩 출현하시므로, 인류역사상 매우 희귀한 선각자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말하는 성불의 의미는 붓다와 똑같이 윤회가 끝나는 아라한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라고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다음으로 부처의 성품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처의 성품이란 부처의 마음을 말합니다. 부처의 마음이 뭔지 알려면,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네 가지 마음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네 가지 마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가 선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선심입니다. 둘째가 선하지 못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불선심입니다. 선심과 불선심을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가 과보심입니다. 과보심은 인과응보의 마음으로 원인과 결과의 마음입니다. 선심과 불선심이 있고, 과거에 내가 선한 행위로 만들어 놓은 선과보심과 불선한 행위를 해서 만들어 놓은 불선 과보심이 함께 있습니다.
넷째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부처의 마음이고 아라한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부처의 성품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네 번째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말합니다. 붓다는 선심, 불선심, 과보심을 여의고 오직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래서 새로운 욕망을 일으키지 않아 다시 태어나는 마음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선심과 불선심은 함께 붙어있는 상대적인 마음입니다. 선하다고 할 때는 불선이 붙어있고, 불선하다고 할 때는 선한 것이 함께 붙어 있습니다. 그러나 붓다의 마음은 선과 불선을 뛰어넘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기 때문에 상대적인 마음이 아니고 모두 선한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부처의 성품인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해서 우리 마음에 내재해있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질 때 부처나 아라한이 됩니다. 이 마음은 우리에게 잠재되어 있지만 어리석음과 욕망이 눈을 가려서 계발되지 않고 있습니다. 부처의 마음과 범부의 마음이 같다고 하는 것은 다 같이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입니다.
부처는 그 마음을 계발해서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을 가지고 계신 반면, 범부는 계발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부처의 성품이란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 부처의 마음을 뜻합니다.
- 법사님, 이런 질문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무척 궁금하여 문자 올립니다. 한 겁이 지나면 우주가 다시 시작되는지요?
먼저 겁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겁이란 헤아릴 수 없는 단위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1겁이란 사방 200자의 바위가 있는데 백년에 한 번씩 천인이 옷자락으로 쓸고 지나가서 이 바위가 모두 닳아 없어지는 시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니 상상 초월하는 세월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개념은 인간세상과 천상이 다릅니다. 인간이 한평생을 사는 60년이 천상에서는 하루입니다. 그러니 이런 문제는 우리의 인식의 영역 밖에 있는 것들이라서,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또 질문하신 것처럼, 겁에 상관없이 우주는 계속됩니다. 겁은 시간 개념이고, 우주는 조건에 의해 끊임없이 생성,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우주가 어느 겁에 어떻게 변하는가는 일정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이 지구도 끝이 나겠죠? 지구의 종말이 올 때, 여기 사는 인간들이 어떻게 될까는 걱정하지 마세요. 광음천에 태어난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죽음으로 완전히 존재를 끝낼 수 있는 사람은 부처나 아라한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끝내고 싶어도 지은 업 때문에 끝낼 수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겁이나 우주 같은 것은 불교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오직 한 인간의 정신과 물질에 관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자기 자신의 머리에 붙은 불과 가슴에 박힌 화살을 뽑는 것이 급선무라고 하셨습니다. 불교는 오직 자기 자신의 번뇌를 해결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있다는 것을 이해하시고 ‘이런 궁금증이 있었네’라고 아시면 되겠습니다.
- 묘원 법사님, 저는 수행을 하려면 자꾸 잡념이 생기는데, 어떻게 하면 잡념을 없앨 수 있는지요? 차분히 앉아서 수행을 하려고 해도, 얼마 지나지 않아 자꾸 다른 생각으로 빠지고 맙니다.
망상은 누구나 똑 같이 겪고 있는 고민입니다. 그러므로 매번 이런 질문을 하셔야 합니다. 잡념은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당연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음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과보심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가만히 있어도 과거에 먹었던 마음이 계속 떠오릅니다. 치고 들어와요. 낮에 있던 잔상들이 남아 있어서 밤에 꿈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끊임없이 나타나는 것은 마음이 가진 구조적 문제입니다. 과보심, 습성, 이런 것이 나오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잡념은 불가피한 현상이라고 받아들이시고, 우리가 이러한 습성으로 살고 있다고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수행이 어려운 것입니다.
이제는 잡념과 맞서지 말고 잡념이 일어날 때마다, ‘지금 망상하고 있네’ ‘지금 잡념이 일어났네’ 라고 그 사실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열 번이고, 스물 번이고, 백 번이고 계속 알아차려서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집중력이 계발됩니다. 이런 집중력에 의해서 나중에는 잡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때까지는 계속 오도록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망상이 떠오르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는 말입니다.
잡념이 생겼을 때는, ‘잡념이 일어났네’하고 잡념과 싸우지 않는 것이 좋은 방법입니다. 화합할 때 잡념이 양보합니다. 맞서서 없애려고 하면 잡념의 힘은 더 커지기 마련입니다.
-아들이 기독교 재단의 중학교를 다니고 있는데요,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 불교적 정서를 가지고 있는 아들에게는 참 괴로운 일인 것 같습니다. 전학하는 것도 생각하고 있지만, 쉽지 않고요. 아들에게 어떤 지혜로운 말을 해 주어야 할 지 답답합니다.
말씀을 드리기에 앞서, 이 학생이 불교신도로서 불교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고, 기독교 학교에 다니면서 얼마나 갈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문제는 제가 잘 모르겠어요. 혹시 이게 어머니 생각 아니에요? 그럴 가능성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불교 집안에 태어났어도 기독교재단의 학교에 다닐 수밖에 없다면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이런 문제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종교는 순기능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역기능을 하기도 합니다. 자기 종교만 주장하면 역기능을 해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평화로워야 할 종교가 오히려 전쟁을 일으켜서 인류역사의 비극이 되고 있습니다.
진정한 종교라면 오히려 다른 종교를 더 존중합니다. 어떤 기독교 학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운 뒤, 자기가 믿는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남의 것을 배척하고 버리라고 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괴로움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며, 어떤 특정한 것을 주장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만 전쟁이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학생이라면 다른 종교도 배울 수 있어 오히려 좋습니다. 아드님이 전인적인 인격을 갖기 위해서는 기독교에 대해서 배타적인 감정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자꾸 내 종교만 주장해서 아드님을 편협하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기독교는 나름대로 인류역사에 한 자리를 매김하고 있습니다. 내 종교만 주장하면 다른 종교를 부정하게 되어 독단적인 교리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만든 옷을 입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재배한 농작물로 식사를 하고,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다니고, 다른 종교를 가진 선생님으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이럴진대, 내 종교만 주장해서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이런 문제는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이해하셔야 하겠습니다.
-묘원 법사님, 열반에 대해서는 좀 이해를 하겠는데요, 반열반이란 무슨 뜻인지 한 번 더 설명 부탁드립니다.
열반이나 반열반이나 큰 의미에서는 같습니다.
열반은 특수한 정신적 상황입니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가 나서 집착이 완전히 끊어져야 합니다. 실오라기만한 탐욕이나 괴로움, 자아가 있으면 못 들어갑니다. 완전히 청정해진 상태입니다.
열반은 죽을 때 경험하는 열반이 있고, 살아서 경험하는 열반이 있습니다. 이때 살아있을 때 경험하는 열반을 유여의 열반이라고 해서, 몸을 가지고 체험하는 열반을 말합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들이 수행을 하면서 들어갔다 나오고 들어갔다 나오면서 계속 체험하는 열반입니다. 몸을 가지고 의식이 끊어진 상태를 계속 체험합니다. 그러니까 수다원의 상태에서도 한 시간에 몇 번씩 들어갔다 나올 수가 있습니다. 잠깐 10분씩, 20분씩. 부처님은 1시간씩 들어가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반열반이란 것은 부처님이나 아라한이 죽을 때 느낌에서 욕망으로 넘어가지 않아 다시 태어나지 않는 열반을 말합니다.